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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임진왜란 해전 순서 본문
이순신 장군은 1945년(인종 1) 음력 3월 8일 한성부 건천동(현재의 중구 인현동)에서 아버지 이정"李貞"과 어머니 초계 변씨"草溪卞氏"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로 이순신 가문은 비교적 순조롭게 출세를 이어왔는데 할아버지"이백록"이 기묘사화로 숙청된 조광조의 일파로 간주되면서 아버지까지 관직에 나서지 못해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순신은 어린시절 부터 전쟁놀이를 즐기며 매우 용감했다고 전해지는데 훗날 영의정에 오른 "유성룡"(1542~1607)이 같은 마을에 살았던 이순신에 대해 "징비록"(유성룡이 임진왜란 동안에 경험한 사실을 기록한 책:국보 132호)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 했습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했는데 아이들과 모여서 놀 때는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즐겨했다.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감히 그의 문 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는 활쏘기를 좋아했고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 또한 말을 타고도 활쏘기를 잘했고 글씨를 잘 썼다."
위의 "징비록"의 글을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이순신의 어린 시절이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과격했다고 보이기도 하지만 임진왜란에서 연전연승으로 나라를 구한 이순신을 회상하며 유성룡이 기록한 글이기에 다소 용맹스럽다는 것을 부각한 것으로도 보입니다.
아무튼 무인의 자질이 강했던 이순신은 처음에는 문과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진로를 바꾸고 28세가 되던 해에 처음으로 무인 시험에 응시하게 되는데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다리를 다쳐 부상을 입으면서 낙방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1576년 32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게 되면서 관직에 나서게 됩니다.
하지만 이순신의 강인하고 올곧은 성격이 적당히 자리를 지키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눈에 가시로 비치게 되었고 좌천과 강등 그리고 복직을 오가며 순탄치만은 않게 흘러갔습니다.
1587년에는 녹둔도의 둔전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게 되었는데 여진족의 동태가 의심스러웠던 이순신은 북병사 "이일"에게 병력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이때 여진족의 침입으로 큰 피해를 입으면서 감옥에 갇히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패전의 책임이 이순신이 아니라는 것이 조금은 밝혀지면서 중형을 면하게 되었고 이후 백의종군(벼슬이 없는 신분으로 전쟁터에 나감)으로 여진족 장수를 잡는 등 큰 공을 세우며 공직에 복귀하게 됩니다.
이후 1591년(선조 24)에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한 이순신은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며 많은 노력과 준비를 기울였고 이듬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승의 신화를 이루어냅니다.
지금부터 이순진 장군의 임진왜란 해전 순서를 살펴보겠습니다.
(추정 왜군 피해)
1592년
5월 7일: 옥포 해전 - 거제시 옥포
(26척 격침)
5월 7일: 합포 해전 -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전멸 : 5척 격침)
5월 8일: 적진포 해전 - 통영시 광도면
(전멸 : 11척 격침)
5월 29일: 사천 해전 -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전멸 : 13척 격침)
6월 2일: 당포 해전 - 통영시 산양읍
(전멸 : 21척 격침)
6월 5일: 1차당항포 해전 - 경상도 고성 당항포
(전멸 : 26척 격침)
6월 7일: 율포 해전 - 거제 장목면
(3척 격침 및 4척 포획)
7월 8일: 한산도 대첩 - 통영시 한산도
(59척 격침 및 12척 포획)
7월 10일: 안골포 해전 - 경상도 진해 안골포
(전멸 : 42척 격침)
8월 29일: 장림포 해전 - 부산 사하구 장림동
(6척 격침)
9월 1일: 화준구미 해전 - 부산 사하구 몰운대
(5척 격침)
9월 1일: 다대포 해전 - 부산 사하구 다대동
(8척 격침)
9월 1일: 서평도 해전 - 부산 사하구 구평동
(9척 격침)
9월 1일: 절영도 해전 - 부산시 영도구
(9척 격침)
9월 1일: 초량목 해전 - 부산 동구 초량동
(4척 격침)
9월 1일: 부산포 해전 - 부산 사하구 구평동
(128척 격침)
1593년
2월 10일~3월 6일: 웅포 해전 - 창원시 웅천동
(51척 격침)
1594년
3월 4일: 2차 당항포 해전 - 경남 고성군 당항포리
(전멸: 31척 격침)
9월 29일: 장문포 해전 - 경남 거제시 장목리
(2척 격침)
연전연승의 무패 신화를 써 내려가던 이순신 장군은 전투에 너무 소극적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1597년 4월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으며 한 달여 동안 옥에 갇히어 고초를 겪게 됩니다.
위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게 된 배경에는 원균과의 불화와 함께 왜군의 술수가 작용했는데 왜군은 이중첩자에게 거짓 정보를 흘렸고 이것에 휘둘린 조정은 이순신에게 출정할 것을 명령합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왜군의 술책에 말려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하면서 다소 소극적으로 대응했는데(물론 출정은 했지만 이미 왜군이 상륙한 이후라 공격 명령을 수행할 수 없었음) 이때 원균과 그를 지지하는 조정 대신들이 이순신이 전투에 출정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는 장계를 올려 결국 이순신을 탄핵하게 됩니다.
(물론 당시 임금이었던 조선 14대 왕 선조"宣祖"도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오르는 이순신을 견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의 직책을 물려받아 1957년 7월 15일 칠천량 해전(거제도와 철천도 사이의 해엽)에서 크게 패하며 조선 수군은 거의 전멸하게 됩니다.
그제야 다시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였는데 남은 전선은 12척에 군사는 약 120여 명이 전부였습니다. 이때 조정에서는 더 이상 조선의 수군은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육군으로 합류하던가 아니면 후퇴하여 미래를 대비하라고 제의합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라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장계를 올리며 싸우기를 결심합니다.
이후 1597년 8월 27일 전라도 해남 어란포와 9월 7일 진도 벽파진에서 왜선과 대치했지만 싸우지 않고 다음 전투를 준비합니다.(이때 왜군도 조선의 수군이 거의 전멸했지만 항상 패전을 기록했던 이순신 장군이 복귀했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인 듯하다.)
결국 1597년 9월 16일 명량에서 조선의 전선 13척(1척이 보강됨)과 왜선 133척 이상이 전투를 벌이게 되었고 세계 해전 역사상 유래 없는 승리를 거두며 전세를 역전하고 조선 수군도 재건합니다.
1597년
9월 16일: 명량 해전 - 해남과 진도 사이의 해협
(31척 격침)
1598년
7월 19일: 절이도 해전 - 전라도 고흥군 신초리
(50척 격침)
9월 20일~10월 7일: 장도 해전, 왜교성 전투 - 순천 장도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전투 (왜군 3천 여명 사상)
11월 19일: 노량 해전 - 경상도 남해와 하동 사이
(200척 격침, 100척 나포)
그리고 1598년 11월 19일 조선에서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왜선 500여 척을 추격하여 끝까지 싸우다가 이순신 장군은 유탄에 맞게 됩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끝까지 싸울 것을 독려하며 "지금은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고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마지막 노량 해전으로 끝으로 7년간 이어졌던 조선과 일본의 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도 막을 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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